이번 포스팅에서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에 생애와 그의 경제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고 정리해보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 생애 (1899~1992)
189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에서 의사였던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머리는 좋았지만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고 대신 생물학이나 희극을 쓰는 데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 입대해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했는데 전투에서 왼쪽 귀를 다쳤다.
자유를 핵심가치로 여겼던 하이에크도 20대 초반까지는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입학했던 빈 대학교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를 만나, 그의 저서 '사회주의'를 접하고 나서,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였다.
1921년 법학 박사학위를 1923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의 경제 고문이었던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비서로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대학교 제리 마이아 쟁스 교수의 연구 조교로 일했으나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해 1년 만에 귀국했다.
그 후 1927년 오스트리아 경기연구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1931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뒤 런던 정치경제대 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0년부터 미국의 시카고 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말년에는 서독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종신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하이에크는 1944년에 The Road to Serfdom(노예의 길)을 내놓았다.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큰 영향력을 주고 있으며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인기 있는 해설서이다. 또한 20세기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정치 경제 담론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전체주의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다. 비유하자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은 결국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 요지이다. 개인마다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개인들의 목적을 모두 모아 하나의 전체 목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강제력이 필요해지는데 결국 중앙에서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게 된다면 그 누군가는 권력을 쥐게 된다.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가는 듯하여 따르지만 예속의 길, 노예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집산주의적 계획은, 결국 정치적인 자유도 잃게 만들게 된다고 하였다.
왜 대중은 자유를 버리고 노예의 길을 선택할까?
하이에크에 따르면 자유는 경쟁이 기본이고, 노력이 기본이고, 책임이 기본이다. 경쟁하기 싫고 노력하기도 싫고 책임지기도 싫은 미성숙한 대중이 쉽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달콤하게 등장하는 정치 세력이 파시스트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자라고 보았다.
1944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하이에크를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은 이 책이 나오고 몇십 년이 흐른 뒤에야 그의 주장에 주목하였고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정치인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그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강연하였고, 1978년엔 내한한 바도 있다. 그는 꾸준히 시장경제를 옹호하였다.
하이에크의 주장에 매료된 영국의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 처방대로 경제정책을 실시했다. 1979년 정권을 잡은 마거릿 대처 수상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통화를 풀고 정부 지출을 늘리라는 케인스식 처방을 거부했다. 높은 실업률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악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했다. 한편으로는 정부 소유 사업을 매각하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창업을 권장하고 개인의 소득세율을 낮추었다. 대처 수상은 하이에크의 주장대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경제 자유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경제 정책을 펼쳐서 '영국병'을 고치고 영국을 구조 조정하고자 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경제 참모로 하이에크 파를 대거 기용했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레이거노믹스라고도 부르는데 레이건의 연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경제학자가 바로 하이에크였다.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에 하이에크는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 마거릿 대처는 하원에서 하이에크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공산권이 무너질 때의 영예는 굉장했다. 이러한 굉장한 영예 속에서, 그는 1992년에 눈을 감았다.
2) 경제 철학
중국의 전 주석 덩샤오핑이란 사람이 있었다. 덩 샤오핑이 중국 인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경제학자 하이에크를 초청하며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중국 인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하이에크는 답했다.
"농민들의 토지를 사유화하도록 하십시오"
그 뒤 중국은 집단농장체제를 버리고 국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 생산량의 일부만 정부에 내도록 한다. 농산물의 자유시장을 허용한 지 3년 만에 중국 인민들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위 실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에크는 자유를 중시했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규제하려들면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태는 더 악화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케인즈라는 거목에 가려 오랜 기간 무명으로 지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정부의 지출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올라가고 실업률이 떨어지지 않는 경기침체 속에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케인즈 이론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때서야 하이에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이에크는 시장 그리고 민간의 자율과 경쟁을 중시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이다.
이러한 사상은 마거릿 대처 수상과 레이건 대통령에게 큰 영감을 주어 영국과 미국의 경제를 살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반면 시장 실패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면 공격당하기도 하는데 2008년 금융 위기로 인하여 하이에크의 이론이 비판을 받게 된다. 이때 다시 케인즈가 등장하게 된다.
케인즈 파에서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생긴 시장의 실패를 들이대면 하이에크 파는 금융위기는 정부 개입에 따른 정책 실패라고 맞받는다.
진짜 경제 이론은 모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 참고 자료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 나무위키
만화로 보는 맨큐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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